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성 전투 (문단 편집) ==== 공세 초기 전투 ==== >2100 강우와 운무를 헤치고 치열한 적의 각종 포탄이 아주저항선 507고지(CT894456)와 425고지(CT887464)를 중심으로 전후방 일대에 촌토(寸土)도 상관없이 낙하하기 시작함. >----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20p 금성돌출부 우견부에 위치한 중공군은 7월 3일을 기해 529고지인 관망산을 확보하자 대규모 작전을 중단하고 소규모 정찰활동을 전개했다. 이리하여 제3사단은 일주일 동안 정찰활동을 실시, 여러 성과를 내는데 성공하자 사단은 이를 즉각 분석했고 분석 결과 활동 대부분이 관망산 일대에 배치된 우일선 제23연대 지역에 집중되어 있음을 파악하였다. 이때 사단은 중공군이 자신들의 공격대상으로 삼은 제23연대의 방어편성을 관측하여 약점을 찾으려는 것으로 판단했고 7월 1일과 3일 사이에 2개 연대로 추정되는 병력이 남하하는 것과 7일부터 12일 사이에 보급품을 만재한 차량 62대가 남하한다는 정찰 결과를 본 사단장 임선하는 중공군의 공세가 임박했음을 예상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명령문을 하달하였다. >당면한 적은 근간에 이르러 화력과 장비를 계속 전방으로 이동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제23연대 전투지역에 대한 탐색이 급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이들의 침공은 절막한 것으로 판단되며, 적의 주공은 제23연대 정면으로 지향될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사단은 방어중점을 우일선인 제23연대에 두고 적을 진지 앞에서 분쇄하려 한다. > >1. 제23연대는 적의 주공방향으로 예측되는 100번 도로를 제압하기 위해 대전차방어 계획을 추진하고 철저한 야간경계를 실시하는 한편, 적의 조기와해를 위해 529고지 남록의 전진 진지를 강화하라, 화력의 우선권은 제23연대에 둔다. > >2. 제22연대는 현 진지를 보강하고 인접부대와의 긴밀한 연계를 유지하되, 공요화기는 명령에 의해 우일선인 제23연대를 증원할 태세를 갖추라. > >3. 제18연대는 저지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역습계획 '가'안(제23연대 정면)에 의한 출동태세를 갖추라. > >4. 제11포병단은 사격의 우선권을 제23연대에 두라. > >5. 제16탐조등포대(1개반)는 제23연대 지역에서 야간전장 감시에 임(任)하라 > >6. 전차중대는 제23연대 지역에서 대전차방어에 임하라. > >7. 공병대대는 제23연대에 2개 중대를 직접 지원하여 진지구축과 전차진입로를 개설하는 한편, 적 기계화 부대의 침공을 격파할 장애물을 설치하라. 또한 1개 중대는 제22연대를 직접 지원하여 진지구축과 적의 접근을 방해할 장애물을 설치하라. > >8. 통신중대는 군단에서 지원된 1개 유선가설조를 통합지휘하여 유선을 가설하라. 또한 새로이 보급된 AN/PRC-1에 대(對)한 재교육(再敎育)을 실시하라. 이러한 명령문을 하달한 직후, 얼마 안가 7월 13일 21시가 되었는데 이때가 바로 공세의 시작을 알리는 집중포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21시를 기하여 시작된 중공군의 포격은 사단의 주진지인 507고지와 485고지 일대에 집중되었고 평소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포격량이 줄어드는것이 아니라 더 증가되어 나중에는 후방 진지까지 강타했다. 이로 인하여 사단예비인 제18연대 제2대대장이 중상을 입었고, 동대대 OP와 연대OP간 연결되어 있던 유선이 단절되기도 했다. 이후 21시 40분쯤에는 그들의 녹색 신호탄 3발이 룡호동 골짜기에서 치솟아 올랐고 이와동시에 전화력(全火力)이 제23연대의 예비진지인 445고지로 연신되었다. 이때 잠복조로 파견나간 제3중대는 1개 소대의 중공군을 발견하여 이들과 교전중이라는 긴급 보고를 올렸고 이에 제23연대장 박철 대령은 서둘러 포병 지원사격을 통해 해당 구역에 맹타격을 가하였다. 이리하여 연대장 박철 대령은 중공군의 침공방향이 자신의 연대에 지향된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으며 이에따라 전방에 설치한 모든 잠복조들을 원대복귀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한편, 507고지 서남쪽에 예비대로 있던 제2대대와 연대수색중대로 하여금 좌일선인 제1대대의 후사면으로 진출시켜 유사시에 긴급 대응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10분이 지난 21시 50분, 연대의 좌일선인 제3중대는 마침내 조우한 소대규모의 중공군을 격전 끝에 격퇴하였는데 여기서 격퇴당한 중공군은 22시 20분쯤 제1대대 진지로 처들어 가 무차별 포격을 가한 채 다시 재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제1대대의 진전에서 패퇴하고 말았다. 이는 연대장 박경원 대령이 제1대대 공격을 미리 예상을 하고 제2대대를 호출해 제1대대 진지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이와같이 연대 좌일선 각 대대들이 중공군을 격퇴하는 동안, 507고지 남쪽에서는 금성천을 따라 침투한 것으로 보이는 중공군들이 지원사격을 하던 제3중박격포 중대와 연대CP를 기습하면서 연대 지휘부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고 제3중박격포 중대는 이로인하여 지원부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ogejigejg (2).png|width=100%]]}}} || || 여문리 부근 전투 || 한편, 이날 21시 40분쯤에 제22연대는 제9중대의 정면인 송동리 북쪽에서 은폐하고 있던 잠복조로부터 적을 만났다는 신호를 받았다. 이때 신호탄이 하늘에 치솟자 2개 대대규모로 추산되는 중공군이 송동리 앞 소로를 횡당하여 연대 주저항선의 중앙으로 침투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주력으로 보이는 약 1개 연대 규모의 중공군이 주저항선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따라서 연대는 최후 저지사격으로 그들의 파상공세를 측차로 격퇴했으나 중공군은 이미 1:2의 막강한 병력우세를 점한 상황이었고 결국 계속된 파상공세로 인해서 연대의 화망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22시 10분부터는 중공군과 치열한 수류탄 투척전과 백병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제10중대는 연대의 중앙 돌출부에서 유개호를 방패삼아 선방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제10중대에 출현한 중공군 병력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던터라 중대는 20시 21분에 서둘러 본대에 TOT 사격을 요청했고 그 후, 사격이 실시되자 중공군의 공격 태세를 분쇄하여 곧 격퇴시켰다. 이렇듯, 제22연대 진지에서 수많은 중공군들이 들이닥쳐 혈전을 거듭하게 되자 제22연대장 최택원 대령은 중공군의 심상치 않은 기세를 미루어 보아 주진지의 지원은 어려울 것을 판단하고 이에따라 535고지에서 저지진지를 구축중이던 제1대대에게 반격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런데 제10중대와의 싸움에서 격퇴된 중공군들이 다시 병력을 보충 받았는지 곧바로 제3대대의 우측방인 제9중대와 제10중대 진지로 들이 닥치기 시작했고 이에 양중대는 십자포화로써 이들의 진격을 어느정도 저지했으나 1파,2파,3파 그리고 4파 등 미친듯이 공격을 가해오는 중공군들의 기세에 눌려 중대는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에 연대장은 아까 반격 태세를 갖춘 제1대대에게 반격명령을 일단 보류시키고 먼저 제3대대 진지로 급파하라고 명하였다. 이후, 연대장은 제9, 10중대에게 연락을 취하여 제1대대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통보한 뒤, 연락을 끊었다. 이 통보는 연대의 마지막 통보가 되었다. 양중대의 유무선이 포격에 의해 두절됐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적진 깊숙한 663고지에서 청색 신호탄 총 3발이 하늘에 치솟아 올랐다. 이와 동시에 2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돌연 저지진지를 구축하던 제2중대 정면에 나타나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제2중대는 이들과 처절한 육탄전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2중대가 혈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 제2중대를 공격하던 중공군들 중 일부가 제2중대 진지에서 이탈하더니 제1대대OP쪽으로 가 대대OP를 기습하여 대대와 연대간의 유무선을 모두 두절시켰다. 이로 인해 제9, 10중대로 가겠다던 제1대대는 대대 지휘소가 붕괴되면서 그 지휘력을 상실하고 말았고 제9,10중대는 최악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23시 10분에는 룡호동 부근에서 청색신호탄이 하늘에 오르더니 1개 연대규모의 중공군이 또다시 출현하여 제2, 3대대의 북록전연으로 돌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연대를 지원하게 된 제11포병단의 양포병대대는 포신에 물을 부어가면서까지 저지사격을 미친듯이 퍼부었으나 중공군이 독전과 폭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각각 독립해 교통호 간의 연락로를 차단했고 이와 동시에 각대의 상하는 물론 횡적 연락로마저 차단하였으니 각 부대는 고립된 채 분전을 거듭하게 되었으며 23시 50분에는 급기야 연대의 우일선인 제3대대가 붕괴 직전에 놓였을 뿐만 아니라 제1대대도 분산되기에 이르렀으니 포병대의 지원이 끊긴 제2, 3대대는 사실상 풍전등화 상태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사단장 임선하 소장은 당초 예상했던대로 전황이 흘러가지 않을 뿐더러 주공도 제23연대가 아닌 제22연대였기에 결국 이를 반드시 타계하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예비대인 제18연대에게 서둘러 출동태세 및 역습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21.50 급변하는 상황을 대비하고자 사단예비대인 제18연대의 연대장은 명에 의거, 비상 출동준비를 완료하고 제2대대를(CT883453) 지점으로 제3대대를(CT889444) 지점으로 각각 진출시켜 적의 역습을 대비함. >----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20p 이리하여 하루가 지난 7월 14일, 제23연대장 박철 대령은 연대보급집적소와 제3중 박격포 중대를 습격한 소수침투병력을 격멸하고자 연대본부 행정요원으로 급편한 1개 소대로 하여금 이를 격퇴하긴 했으나 전과가 부실했고 이 때문에 재공격 우려가 있어 연대장은 507고지로 증원 간 제2대대의 1개 중대인 제7중대를 차출했고 이후, 연대 후방경계에 임하도록 하는 한편, 대대주력은 다시 우일선으로 격전중인 제3대대로 보내 대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제3대대 후방에 침투한 1개 중대의 중공군을 일시에 격퇴했는데 이들은 얼마 안가 다시 병력을 증원하여 재공격을 기도한 듯, 오전 2시 40분, 맹포격을 가하면서 동시에 일부 병력을 제1중대로, 또 일부병력을 전진 진지인 제9중대를 우회하여 제10중대로 가 피리와 꾕가리를 치면서 진지로 쇄도하였다. 바로 이때, 중공군들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제3대대는 중공군들이 동서상응한 협격지대(제9중대와 제10중대 사이)에 돌입하자 곧바로 최후저지 사격의 신호탄을 쏘았고 이후, 전진 진지에 돌출하여 있던 제9중대가 사격방향을 반대로 전환하여 이에 협공하게 되었으니 결국 진지 내부로 침투하려던 중공군들은 진퇴양난 상태에 빠져 전멸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때마침 제10중대 좌익으로 추진되었던 제1전차소대도 나타나서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듯이 양 중대 사이에 계곡소로로 진입했고 동시에 무차별적 사격을 퍼부었으니 이미 만신창이가 된 중공군들은 자신들에게 포탄과 총탄을 날리는 전차를 피하려고 서로 좌충우돌하였다. 따라서 이를 포착한 대대장은 앞서 화학장교 손중수 대위가 고안해 산중복의 요지, 요부에 설치하고 또 제9, 10중대에도 설치되었던 수제 네이팜 지뢰를 산 아래에다 방투했고 이리하여 작동된 네이팜 지뢰의 화염은 곧 산야를 뒤덮었으며 이를 맞은 중공군들은 마치 불나방 처럼 떨어져 나갔다. 이후, 오전 5시 5분이 되자 동이 트기 시작했고 양 중대의 산정상에는 불탄 중공군 시신들과 동시에 악취가 풍겨 올랐다. [[파일:430 (1).png]] 14일, 오전 1시 10분, 좌일선 제22연대 상황은 485고지 일대를 수호하던 제3대대가 무너져 전선을 이탈해 무질서하게 대대CP로 집결하고 동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능선을 따라 485고지로 지원하러 가던 제1대대는 대대OP가 기습당해 지휘기능이 마비된데다가 이동간에 무질서하게 철수하는 제3대대 병력과 서로 혼합되어 혼란을 야기하는등의 사태들이 터졌음에도 대대CP로 집결한다는 명령은 고쳐지지가 않았다. 이는 다시말해 전투력을 보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분산 상태인 채로 대대CP로 철수한다는 뜻이었다. 한편,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2대대는 돌출한 주진지를 완강히 고수하면서 총 2차에 걸쳐 각각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 공격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중대는 강력화 포격지원으로서 그들을 격퇴시켰다. 바로 이때 사단장 임선하 소장은 분산 상태이면서 집결하려 노력중인 제22연대 장병들에게 격려를 했으며 중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그들을 독려했다. >1.우일선 제23연대는 주저항선을 확보하고 있고 귀연대 좌제1선의 제2대대도 현진지를 고수하고 있으며 >2.제18연대가 485고지에 대한 역습을 위하여 이동중에 있다. >3.이제 우리가 일시나마 그들에게 주저항선이 돌파되기는 하였으나 신장된 그들의 측배에 칠수를 꽂을 때가 바로 절박하였다 그 다음 연대장 최택원 대령에게는 촌각을 망설이지 말고 병력을 수습해 제8사단과의 전투지경선인 535고지를 점령하여 제2대대와 연계해 이를 유지하도록 명령함으로써 현 전황을 호기로 전환시키려 했다. 즉, 사단장의 작전지도를 요약해 말하자면 먼저 공격한 중공군을 그물에 걸린 물고기로 보고 동쪽에선 제23연대로서 그리고 서쪽에서는 제22연대로서 노출된 중공군의 측방을 협격으로 강타하도록 하고 이와 동시에 제18연대로 하여금 진지 내로 침투한 중공군들을 소탕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사단장의 역습 방침에 따라 연대는 정비할 틈도 없이 오전 5시 20분에 현지로 출발하여 제1대대는 535고지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연하는 능선을 점령하고 제3대대는 이와 연계하여 남쪽 1km에 이르는 선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수색중대는 일부 병력을 445고지에 두고 또다른 일부 병력은 양 연대간의 전투지경선으로 침투 가능한 소로에 배치시켜 이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5시 40분 기준, 사단과 연대는 물론 연대와 대대간의 무선을 모두 재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535고지 일원에 포진한 연대는 교암산으로 침공한 중공군에 의하여 밀려난 좌익 제8사단 제16연대의 철수를 잠시동안 엄호했으나 오전 7시에 이르러서는 좌우 인접부대와 서로 단절된 상태인지라 결국 고립되게 되었는데 오전 7시가 됐을 무렵에는 1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포격을 집중하면서 제7중대를 공격해 오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또 중공군의 유격대로 보이는 일부 부대들도 출현해 연대 주보급로를 위협해 왔고 이에 사단장은 보급로가 차단 직전에 놓인 연대에게 철수명령을 하달하면서 연대는 지연전을 펼치고 오전 8시에 509고지-434고지-472고지로 연하는 능선에 우로부터 제3,1대대 순으로 급편 방어진지를 편성하라는 지시도 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rugiehg (2).png|width=100%]]}}} || || 여문리 부근 지연전[* 사진 출처: 6.25전쟁사 제11권,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408p] || 한편, 사단 예비에서 반격으로 전환되게 된 제18연대는 사단장의 명령대로 역습계획 '가'안[* 연습 시 4개 (가, 나, 다, 라)을 발동시켰는데 '가'안은 485고지에 대한 역습이다.]을 발동하여 오전 12시 20분에 제3대대는 기지로부터 551고지 동쪽으로 출격했고 제2대대는 동고지 남쪽으로 진출시켰으며 이후 오전 2시 20분에는 제3대대의 전위대인 제9중대를 출동시켰다. 이때 3대대 9중대가 551고지 동쪽에 이르자 중대는 그곳에서 주둔중인 중공군과 약 40분간 교전을 전개했는데 시간이 흘러 점차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대대장은 후속하던 제10중대를 서둘러 참전시켜 싸우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기에 연대장은 그들의 기도가 금성천을 따라 침공하여 사단주력의 보급로를 차단할 것을 우려했고 이와 동시에 사단과의 통신도 두절 상태였으므로 이를 독단으로써 저지하고자 결심한 뒤, 제9중대에게 485고지 진출을 방해하는 중공군들을 견제하도록 하고 주력은 551고지 사수하는 제1대대와 연계하여 금성천 북안을 방어하기 위해 전진하도록 하였다. 이후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작전상황을 보고하였다. 하지만 사단장은 진출 도중 조우한 중공군과의 교전을 피하고 계속 485고지로 가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는 당초 연대가 기획한 작전기도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명령이었다. 이렇게 사단장의 명령을 받은 제18연대는 제3대대에게 제9중대의 교전을 즉각 중단시키면서 주력을 우회시켜 진격을 계속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대는 연대의 요구를 응한 채 485고지를 목표로 계속해서 약진을 하였다. 하지만 진출할때마다 소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였기에 대대는 이들을 모두 분쇄하면서 앞으로 나아갔고 오전 7시에는 마침내 여문리에 도착하는데 성공했으며 제2대대도 마찬가지로 여문리 서북쪽 0.5km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 2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면서 상황이 곧바로 변하였고 그렇게 연대의 진격은 잠시동안 가로막히게 되었는데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는 중공군 일부 병력이 제1대대 진지인 551고지를 공격하고 또 그들의 주력으로 판단되는 병력은 연대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485고지의 동쪽을 우회하여 남하하는 등 오히려 연대에게 역습을 시도하게 되자 결국 제18연대장 박경원 대령은''' '이미 485고지에 대한 역습은 무의미하게 되었으며 현재 연대는 포위직전 상태이다''''라는 결심을 한채 사단장에게 역습방안 취소를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승인을 받자 연대장은 포위망 돌파를 결정하고 오전 10시에 제차적인 철수와 돌관을 호용한채 큰 지장없이 기지까지 물러가는데 성공하였다. 이렇듯, 일선연대들이 1개 사단 규모에 달하는 중공군의 공격을 견디는 동안 사단장 임선하 소장은 앞서 무너진 우일선 제22연대와 역습에 실패한 제18연대 그리고 우일선 연대의 붕괴로 돌파구가 확장됨에 따라 중공군이 돌파구를 타고 제23연대 구역으로 계속 침공하는 사태등 당초 계획한 작전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진용(陣容)을 재정비하기로 결심하고 이에따라 작지 제60호를 하달하였다. >1. 사단은 일부 주저항선 병력을 교대시키려함. > >2. 제18연대는 좌일선 제22연대의 우일선 방어임무를 인수하여 551고지 일원으로부터 무명고지(509고지 북쪽 0.5km)에 이르는 선을 점령확보하라. > >3. 제22연대는 계속 제2방어선(509고지-434고지-472고지간)을 확보하고 측방경계에 임하라. > >4. 제23연대는 현 진지로부터 수차 철수하여 제18연대와 연계하여 등대리에 이르는 선을 점령하고 우측방 경계에 임하라. > >5. 제11포병단은 각 연대의 진지 진입간 화력지원하고 11.00까지 주파리(동북쪽 1km)의 신진지로 전환하라. 해당 명령문에 의거한 각 부대는 전차와 포병의 엄호 속에 우일선에는 제23연대가 좌일선에는 제18연대등이 각각 담당하였고 마지막 제22연대는 저지진지를 인수하면서 마침내 제3사단은 금성천 북안의 최후거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각 부대원들은 그곳에서 호를 파거나 혹은 중공군의 침습을 저지하기 위한 장애물 설비 같은 기본적인 방어 준비조차 전혀 할수 없었고 오로지 육탄정신 단 하나만으로 몰려오는 중공군들을 상대로 총검을 휘두르거나 아니면 주먹으로 만약 그것도 안된다 하면 다리,이빨등으로써 가장 처절한 백병전을 전개해 끝에는 반드시 분쇄한다는 불굴의 투혼 뿐이었다. 따라서 사단장은 각 연대를 순시하면서 동시에 각 연대가 차지한 현 진지는 그 어떠한 대가를 지불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남겼고 이후 제18연대에게 좌측방으로 침투하여 504고지를 위협하고 있는 중공군을 격멸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제18연대장 박경원 대령은 제3대대로 하여금 504고지로 침투하려는 중공군을 분쇄하도록 하였다. 이때 18연대 제3대대는 목표, 504고지로 향하던 도중, 동고지의 능선을 따라 온 것으로 보이는 1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여 종대로 남하하고 있음을 포착했고 이어 오전 9시에는 진지 전환을 앞둔 포병의 집중사격과 대대의 전화력을 출현한 중공군에게 집중하기에 이르니 기세등등하게 출현하였던 1개 대대의 중공군은 포화에 휩쓸려 그만 와해되고 말았다. 이렇게 중공군이 모두 분산되어 사라지자 제3대대장은 이들을 추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전과를 확대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후속부대로 보이는 약 1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또다시 출현했고 이에 제3대대장은 이 상태에서 추격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공격과 다름 없기 때문에 하달한 추격명령을 즉각 취하하였다. 한편, 대대주력을 후속하던 제10중대는 509고지 동쪽으로부터 공격을 하려는 중공군의 일부 부대와 격돌하여 혈전을 치르게 되었기 때문에 연대로부터 지원요청을 전달했고 이에 연대장은 사단에 요구해 F-51 무스탕 편대 2개를 출격시켜 해당 지역에 기총소사와 네이팜탄을 뿌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제10중대 진지에 출현한 중공군들은 순식간에 무너져 붕괴되었으며 그로부터 30분 후, 전세를 다시 갖춘듯한 일부 부대들이 551고지로 방향을 돌리고 주력인 2개 대대는 양대대의 간격을 통해 침공하기 시작했다. 이와같이 3대대가 공격받고 있을 때 제1대대는 제1중대를 551고지 주봉에서 서측으로 하고 이와 연계하여 좌측으로 제2중대와 제3중대 순으로 산개하고 있었고 한편 배속된 사단 수색중대는 551고지 서북 하단(0.7km)으로 진출하여 중공군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2대대와 연대 수색중대는 지난 역습에서 제22연대의 분산된 병력과 혼합되어 많은 차질을 빚으면서 472고지 북안에 도달했을 때에는 대대 전투력은 고작 70%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는 그들의 파상공세를 막아 진지를 사수하고자 했는데 문제는 우일선인 제23연대가 증강된 2개 연대규모의 중공군 공격을 받고 점차 뒤로 물러나더니 나중에는 중공군 일부 부대가 제23연대의 우측방을 돌파한 뒤, 금성천 강변을 따라 배후로 침투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연대는 분산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전차에_올라타는_국군들 (1).png|width=100%]]}}} || || 전차에 올라타는 국군 병사들 || 이에 앞서 사단장 임선하 소장은 우측 제5사단 전투지경선을 제정하여 사단의 작전구성을 축소한 바가 있거니와 제23연대가 붕괴직전 상황에 직면했을때에는 저지진지를 고수하고 있던 제22연대를 금성천 남안으로 철수시키게 하고 이어 제23연대로 하여금 중공군의 공격을 이탈하게 해 551고지-472고지를 점령하여 제18연대와 연계를 이루고자 하였다.(작지 제60호) 이에 따라 사단은 우측방으로 공격해 오는 중공군을 저지하겠다는 결심으로써 금성천 북안에 교두보를 설치하게 되었으며 이후 제23연대장은 사단장의 결심대로 제1대대로 하여금 551고지로부터 472고지 간을 반드시 고수케하여 제18연대와 연계를 이뤄 근접 해 오는 중공군을 격멸하게 하였다. 그리고 제3대대에게 472고지 주봉을 포함한 금성천 강변로의 접근을 원천 차단하게 했고 마지막 제2대대에게는 연대 예비대로 지정 및 광대곡 북쪽 능선에 배치해 저지진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는데 이렇게 진영을 갖추었을 때는 오전 11시 20분쯤이었고 그동안 포병대의 지원은 단 하나도 없었으며[* 당시 사단 포병대대는 오전 9시에 17번 도로상의 추동에 위치한 예비진지로 이동했는데 이들 포병대대가 도착한 시기는 2시간 후인 오전 11시였으며 그동안 포병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아 지원화력에 약화를 초래하였다.] 더군다나 중공 제60군은 제3사단의 새 진지를 목표로 삼아 3개 방면으로써 협격을 가해왔고 이러한 대공세에 병력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던 '''제23연대의 방어준비는 사실상 희생자만을 속출시킬 뿐 아무런 성과도 없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 후, 제3사단을 비롯한 전(全) 군단 전면에서 중공군의 대공세 파동을 마주함에 따라 철수가 불가피하게 되자 제3사단 역시 금성천 북안으로의 철수가 기정사실화 됐고 이에 따라 군단장 정일권 장군은 미 제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의 요구대로 사전협의를 통해 군단작명 제5호를 7월 14일 오전 11시 30분 부로 급히 발령하여 예하 사단들을 금성천 남안으로 철수케 하였으니 이로써 제3사단도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철수준비를 해야 했다. >군사극비 > >군단작명 제5호 > >지도대한 1:25000 > >제2군단 >강원 화천 토고미(土古味) >(CT 835.207) > >4286. 7.14.11.30. > >1. >가. 최근정기 정보 보고 참조 >나. 제8군은 현 임무를 속행한다. >다. 극동 공군은 계속 제8군을 지원한다. > >2. >가. 군단은 4286. 7.14 11.30부로 제11사단을 통합지휘하여 신주저항선 진지를 점령 현진지를 수행하려 함. >나. 별지 작전 투명도 참조 > >3. >가. 제6사단(제9연대 배속) >⑴ 4286. 7, D일 H시 부로 신주저항선을 점령방어하라 >⑵ 4286. 7.15 18.00부로 제11사단에게 현임무를 인계함과 동시에 제9연대 작전지휘권을 제11사단에게 이양하라 >⑶ 4286. 7. 15. 1800부로 제6사단 지원중인 전차를 원대복귀시키라 >⑷ 교대 후는 CT811101 825300 835230 860203에 위치하여 군단 예비대가 되라. > >나. 제11사단(-) >⑴ 4286. 7, D일 H시 부로 제6사단 방어지역을 인계함과 동시에 제9연대를 통합지휘하라 >⑵ 도로사용은 17,6번 도로를 이용하라 > >다. 제8사단 >4286. 7 D일 H시부로 신주저항선 진지를 점령방어하라 > >라.'''제3사단''' >4286. 7, D일 H시부로 신주저항선을 점령방어하라 > >다. 제5사단(-) >현임무를 속행하라 > >바. 제1전차대대 >4286. 7.15 1800부로 제6사단 지원중인 전차를 통합지휘하라 > >사. 제5포병단 >4286. 7.14 1600까지 신주저항선의 부대를 지원할수 있도록 포를 재배치하라 >⑴ 기도비닉을 주의하라 >⑵ 철수 간, 적과 접촉을 유지하라 >⑶ 철수간 전(前), 포전 협동을 긴밀히 하라 >⑷ 인접부대와 협조하라 >⑸ 철수후퇴 이동의 제원칙을 이행하라 > >4. >가. 행정부록 참조 > >5. >가. >⑴ 현 SOI 유효 >⑵ 철수 간 무전사용을 금(禁)한다 > >나 >⑴ 변동무(変動無) >⑵ 각 사단CP는 각 사단에서 선정 후, 보고하라 > >군단장 육군중장 정일권 따라서 사단장 임선하 소장은 작지 제61호를 하달하여 제23연대를 예비대로 제18연대는 여내곡을 중심으로 한 신 진지를 점령하도록 했는데 해당 계획에 의거한 제23연대가 소성동 목교로써 철수하여 재집결을 했을 무렵, 중공군에게 집중포격을 받았고 그로인해 분산되어 그저 일부만이 질서를 유지한채 각 대대별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 제23연대 예하 각 장교들은 포로가 될것을 우려하여 미리 계급장을 뗀 채 후퇴를 감행했고 이 때문에 사병들은 단순 육안으로 장교를 판단할 수가 없어 결국 지도 혹은 쌍안경을 보유한 사람을 무조건 장교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사단은 7월 14일 12.00부로 신주저항선을 점령확보하려 함. >1.제18연대는 여내곡 중심으로하여 신진지를 점령 확보하라. >2. 제23연대는 제2방어선의 우일선에서 무명고지(689고지 남쪽 0.4km)를 고수하여 사단예비로써 대기하라. >3. 제22연대는 제2방어선의 좌일선에서 529고지를 확보하여 사단예비에 임하라 >---- >작명 제61호 한편, 작명 제61호에 따라 철수하는 제23연대를 엄호하게 된 제18연대는 23연대의 철수를 좀 더 순조롭게 하기 위해 연대의 사주방어 태세를 축소했고 이후, 제23연대의 철수 엄호에 주력하게 하였으나 제23연대가 철수한 이후로는 제18연대가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제18연대는 중공군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았고 결국 포위망이 더욱 압축되자 제18연대장 박경원 대령은 오후 1시 기준으로 철수를 결정한 뒤, 이를 기만하기 위하여 연대의 전화력으로써 중공군의 기세를 강타한 다음, 제1, 2, 3대대순으로 철수하도록 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후 철수계획에 따라 연대는 오후 1시 20분 기준 마침내 금성천을 도하하는데 성공한다. 이로써 제22연대 제2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들이 금성천 남안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고 이와 동시, 제18연대는 오후 2시 30분에 신진지에 진입함에 따라 연대OP를 625고지에 두고 우일선을 제1대대로 지정하여 여내곡 부근에 배치했다. 또 18연대는 제3대대에게 제1대대와 협세하게 하여 565고지 북쪽 하단에서 동서로 지정했고 동시에 제2대대에게는 625고지 일대에 배치시켜 소성동으로부터의 계곡 접근을 원천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후, 제18연대는 폭우 속에서 저녁식사를 추진했고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각 부대들에게 본래 임무구역으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그런데 이때 연대의 뒤를 따라 도하한 것으로 추정되는 중공군 대군이 이들 앞에 출현하였고 이들 중공군은 곧 두 갈래로 분열되어 제18연대 제1대대 진지로 침공해 왔다. 따라서 제1대대와 공격한 중공군과의 사이에서 대규모 교전이 발발했으며 시간이 지나 전투가 더욱 더 격화되는 가운데 18연대 제2대대 진지에서도 중공군들이 대거 출현함에 따라 제1대대 한정으로 끝날줄 알았던 전투는 곧 연대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연대장 박경원 대령은 각 대대장에게 "우리는 중과부적으로 이곳까지 이르렀으나 그간 우리는 그들에게 막심한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세한 항공력으로 신장된 그들의 보급로를 맹타함으로써 불원 교적(驕敵)의 전의를 박탈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적을 산악으로 유인하여 교착케하고 격멸하는데 있는 바 각대는 유리한 현 진지를 필승의 신념으로 고수하라"고 지시한 바와 같이 임전무퇴라는 결의를 다짐하였다. 이렇게 제18연대가 포위망에서 벗어나고 이어 추격한 중공군과 격전을 치르는 동안 사단 부대중 유일하게 철수를 하지 못한 제22연대 제2대대는 적중에 고립되어 중공군을 상대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제2대대장은 적중에 고립된 현 상황을 보아 본대와의 연락을 닿기 이전까진 무슨짓을 하더라도 반드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윽고 대대장은 사주방어 및 경계 강화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이미 본대와의 연결도 끊어진 터, 더군다나 탄약도 바닥 나버렸기 때문에 일인당 탄약 휴대량이 최소 6발에서 최대 15발에 불과해 주변에 있는 아군 시신과 중공군 시신들을 뒤져 탄약을 얻어내는 실정이었으며 식량또한 대대보급소가 지난 오후 11시에 중공군으로부터 기습을 당하여 마비된 상태라 사실상 전투 지속은 불가능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rguhguieh_(1) (1).png|width=100%]]}}} || 따라서 대대장은 각 중대장에게 적중돌파에 대해 "대대는 전력으로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남쪽으로 향하여 전진하려 한다. 돌파로는 고지를 연하는 능선을 따를 것이며무명고지(606고지 동북쪽 0.6km)에 이르기까지는 제7, 5 및 제6중대 순으로 지원중에 있는 중대로부터 수차철수를 실시하고 해고지부터는 역순으로 606고지-585고지-439고지-세현리를 거쳐 그들의 전선을 돌파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으니 제2대대는 대대장의 명령대로 먼저 기만을 위해 집중사격으로써 중공군의 기세를 견제한 다음, 전상자를 먼저 제7중대와 같이 보낸 후, 계획에 따라 중공군을 몰아내며 오후 2시 45분, 마침내 진지에서 벗어나기에 이르렀다. 대대장은 제1목표였던 무명고지에 도착하자 부대를 재정비했고 이후 606고지를 점령한 뒤에는 수색조를 편성하여 죽동으로 보내 그곳을 수색한 후 439고지로 복귀해 대대주력과 합세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출동된 대대 수색조는 죽동 부근으로 근접하여 수색을 펼치는데 성공하였으나 여기서 약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했고 이에 수색조는 이들과 교전을 벌이다가 결국 분산됨에 따라 439고지로 복귀해 대대주력과 합세하게 되었다. 이로써 대대장은 중공군이 곧 있으면 이곳으로 공격을 가할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중대를 이끈채 414고지-동교량을 거쳐 17번 도로를 따라 남진함으로써 오후 7시 30분, 동막동에 집결하여 오후 8시에는 연대주력과 합세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전투로써 대대가 얻은 전과는 살상자만 715명이고 노획은 체코제 기관총 11정 및 다발총 88정 그리고 기관단총 42정 등이었는데 제2대대는 이 무기들을 가져가지 않고 전부 현지에서 매몰 또는 파괴하였다. 반면에 대대의 피해는 전사자가 29명, 부상 30명등으로 전과에 비하면 매우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